제 목 : 히말라야, 죽음 담보로 깨달음 얻는 성지(시사저널)


글쓴이 : 박성배 조 회 : 23 글쓴때 : 1999/10/24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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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聞입니다.
시사저널(www.munhwa.com)제 512 호(1999년08월19일)에서 퍼 온글입니다. 좋은 내용이고 정리가
잘 된 것 같아서... 산쟁이도 글을 잘 쓰는 사람 많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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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죽음 담보로 깨달음 얻는 성지>
근래 들어 국내 산악인들이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했다는 낭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그만큼 해외 고산을 찾는 우리 산악인이 많아졌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해마다 20개가 넘는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를 등반
하고 돌아왔다. 이런 추세는 한국 산악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작년 한 해에 히말라야를 등반한 세계 각국 원정대는 무려 3백90팀에
달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의 28%인 1백10개 팀이 14개 봉으로 한정되어 있는 8천m급 산에 몰렸다는 것이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는 말로리의 선답이 이제는 ‘8천m가 거기 있어 오른다’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세계 산악인들이 이처럼 자이언트 봉을 선호하는 경향은 80년대 중반부터 계속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히말라야로 진출한 지 37년밖에 안된 한국 산악인들이 8천m급을 선호하는 경향은 외국보다 훨씬 더 강하다. 62∼97년 한국 원정대 2백86개가 히말라야에서 등반 활동을 펼쳤는데, 그 중 32%에 달하는 92개 원정대가 8천m급 산을 목표로 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참가 대원을 분류하면 그 정도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35년간 8천m급 원정대에 참가한 연인원은
1천53명으로, 같은 기간 히말라야 원정에 참가한 전체 인원 2천1백70명의
거의 절반에 이른다. 가히 ‘8천m 증후군’이라 할 만하다.

그 결과 한국은 에베레스트 등정자 27명을 포함해 8천m급 등정자를 1백38명 배출했다. 이 추세대로라면 머지 않아 한국 산악계에서 8천m봉 한번 못 가보고는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8천m급 산을 너도나도 오르다보니 한 사람이 여러 봉우리를 오르는 기록도 속출해, 8천m급을
3개 봉 이상 등정한 사람이 14명에 이른다.

최근 엄홍길과 박영석 두 산사나이가 각각 12개 봉과 10개 봉을 등정하고 남은 산 등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벌써부터 두 사람에게는 방송사들이 나뉘어 가열차게 취재 경쟁을 벌이고, 스폰서들이 전속 계약을 맺으려 줄을 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들과 이들 주위 사람들이 14개 봉 완등을 놓고 벌이는 소리 없는 경쟁을 걱정한다. 14개 봉 등정은 각자가 나름으로 등반을 추구하다 자연스럽게 이룩하게 해야지 경쟁 심리를 부추겨서는 무리가 따른다는 얘기다.

어쨌든 히말라야 8천m급 정상은 이제 많은 국민에게 익숙한 높이가 되었으며, 그런데도 국민은 여전히 관심과 찬사를 보내고 있다.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산은 인간에게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곳은 신이나 악마가 사는 곳이지 인간의 영토는 아니었다. 그러나 1786년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이 등정되면서 산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도전하고 극복할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고립된 문명에서 탈출해 자신들의 주체성을 확인시켜 줄 구체적인 대상으로 산을 선택했고, 산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안겨 주었다. 그로부터 70여 년에 걸쳐 그 전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알프스 산맥 1백40여 고봉이 차례로 사람들의 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심리적 영토 확장 전쟁터였던 히말라야인간이 히말라야를 등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알프스보다 훨씬 늦은 1883년이었다. 히말라야란 중앙아시아 남쪽과 인도 대륙 북쪽에 장장 2천5백여㎞에 걸쳐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산맥을 일컫는데, 글자 그대로 ‘눈(히마)의 거처(알라야)’이다. 6천m급 봉우리 8백여 개와 7천m급 산 2백50여 개, 그리고 8천m급 14개 거봉을 거느린 히말라야는 오지 중의 오지여서, 산밑까지 접근하는 데도 여러 난관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등반이 시작되면서 직면한 또 다른 한계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알프스보다 혹독한 추위와 바람, 그리고 고산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반 고도를 높일수록 기압은 내려가고 그와 비례하여 공기 중의
산소 분압이 떨어졌다. 해발 5,300m에 이르자 공기 중의 산소량이 평지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8천m에 다다르자 산소는 평지의 30%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다. 여기서 산악인들은 마치 어항 속의 물고기를 건져놓은 것처럼
맥을 못 추었다. 대부분의 대원이 두통·구토·호흡 곤란·시력 장애 등
고산병에 시달렸고, 일부는 뇌수종과 폐수종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죽음의 지대’라고도 불리는 이 8천m 선을 넘어 등정을 이룩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0년에야 프랑스 원정대가 최초로
안나푸르나(8,091m)에 올랐으니 처음 진출한 이래 67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나머지 전인 미답의 8천m급 산을 모두 초등정
하는 데 또다시 14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히말라야 8천m급 14개 봉 초등정이 모두 이룩된 배경에는 사실 참가국들의 국가주의가 깔려 있었다. 영국·미국·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일본·중국 등 2차 세계대전의 주역들은 전쟁이 끝나자 주체할 수 없는 운동성을 히말라야에서 펼치고자 했다.
원정대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로 꾸려졌고, 그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8천m급 산에 자국 국기를 꽂고자 경쟁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심리적 영토 확장이요, 또 다른 세계대전이기도 했다.

히말라야 영웅주의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이다. 역사적 위업의 선두에 있었던 등정자는 한몸에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이 영웅주의는 히말라야를 등정한 영광이 등정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등반에 참가한 모든 대원의 것이어야 마땅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것을 유념한 이탈리아의 K2(8,611m)원정대는 54년 초등정 후에도 한동안 등정자 이름을 밝히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登頂주의 가고 登路주의 오다
8천m급 열네 봉우리가 모두 인간의 발 아래 놓인 뒤 히말라야 등반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영국의 머메리라는 사람이 정상 수집(피크 헌팅:peak hunting) 등반에서 탈피하고자 알프스에서 주창한 뒤로 히말라야로 옮겨온 이 등반 사조는, 그 말이 설명해 주듯 하나의 산을 오를 때 등정(登頂)보다는 등로(登路)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로란 단순히 새로운 길(route)로 오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way)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독 등반·무산소 등반·무셰르파 등반·속공 등반 등 더 어려운 상황 극복을 목표로 한 등반을 말한다. 75년 수직인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 루트를 뚫으면서 빛을 본 등로주의는 세계 등반계가 결과와 과시 지향의 국가주의 원정에서 벗어나 개인의 신념과 철학에 바탕을 둔 등반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루에 53명이 에베레스트 올라90년대에 들자 히말라야 8천m급 산으로 세계 각국의 원정대가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80년대만 하더라도 1년에 3∼4명이 오를까 말까 하던 에베레스트에 95년에는 어느날 하루에 53명이 등
정하는가 하면, 한 해에 백명이 넘게 등정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단 하루 만에 5,400m 베이스캠프에서 8,848m 정상을 왕복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으로 내려오는 등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8천m급 14개 봉을 모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한 산악인도 올해까지 6명에 이른다.

가장 먼저 14개 거봉 완등을 성취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이다. 그는 70년 26세에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한 것을 시작으로 42세 때인 86년에 로체 봉에 올라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그는 단순히 14개 봉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8천m 고봉에서 무산소와 단독·속공 등반 등 등로주의를 실현해 세계 산악인들의 정신과 행동에 귀감이 된 사람이다.

메스너의 뒤를 이은 완등자는 87년 폴란드의 쿠크츠카, 95년 스위스의 로레탕, 96년 멕시코의 카르솔리오와 폴란드의 비엘리츠키, 그리고 올해 봄 스페인의 파니토 등 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제각기 이전 등정자보다는 발전된 등반 방식을 선택해 눈길을 모았다. 14개 거봉 완등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1년 내에 3∼4명이 더 나올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두 산사나이가 완등을 눈앞에 두고 있어 이들 중 누가 먼저 그 대열에 오르게 될 것인가가 벌써부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돌이켜 보면 국내 산악인들의 고산 등반 활동은 복잡한 생활에 찌든 도시인에게 대리 만족을 주었고, 몇몇 획기적인 등정을 통해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인의 히말라야 등반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국위'를 선양하는 일로 인정받아 왔다. 이렇듯 히말라야 고산 등반 활동은 개인적인 차원을 초월해 항상 한민족의 도전과 극복 정신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올림픽 메달 거부한 까닭그러나 한편으로는 히말라야 원정이 그 과정과 내용보다 산의 높이나 등정 결과만 포장되어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들이 헤쳐 나간 불확실성과 어려움의 깊이보다 등정에 성공했는지 여부나 등정한 산의 개수에 더 관심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업주의 매스컴이 더욱 부추겨 순수 등반 행위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과시적 등반만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인홀트 메스너가 올림픽 메달을 거부한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메스너의 8천m급 14개 거봉 완등 위업을 기리기 위해 88년 겨울 올림픽 기간에은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메스너는 메달 수상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등반 행위는 결코 스포츠의 잣대로 평가될 수 없다고 강조하며 그가 행한 등반의 고귀함을 지키려 했다. 이것은 등반 행위를 스포츠화하는 데 대한 산악인들의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오래 전부터 산악인들은 진정한 등반가란 산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과 여러 한계 상황과 맞부딪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고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계발하는 사람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등반을 ‘죽음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이라든지 '무상의 행위’라고 불렀다.

그래서 정통 산악인들은 등반 행위를 스포츠와 동일시하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스포츠가 일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객관적인 기록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데 반해, 등반 행위는 그러한 조건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은 매일 매시각 그 환경이 변한다. 앞서 오른 사람이 쾌청한 날씨에 오른 산을 다음날, 혹은 다음달에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풍설을 뚫고 올라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두 사람이 같은 높이의 같은 산을 등정했다고 해서 같은 기록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이 각기 다른 루트로 올라갔으면 더더욱 그렇다. 여기다 셰르파를 몇 명이나 고용했는지, 인공 산소를 공급받았는지 따위 내용에 따라 그 산에서 각자가 극복한 한계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 등반 행위는 자신의 신념으로 선택한 산에서 스스로가 규칙을 정하고 스스로가 심판이자 관객이 되어 남이 아닌 자신과 싸우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보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형의 ‘자기 발견’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극복한 등반의 전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므로 등정 결과만 가지고는 서로를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철학에 바탕을 둔 등반 행위를 스포츠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엄홍길·박영석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14개 고봉을 먼저 다 올랐다고 해서 그가 다른 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없다. 소설가가 작품 수에 비례해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8천m 고봉 완등은 우열 관계를 떠나 한국 산악사에 기록될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부 매스컴의 보도처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바른 등반 문화의 성숙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날 히말라야 등반은 과거의 대규모 원정과 과시주의 등반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해 소규모 등로주의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의 등반은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그리고 혹시, 우리들의 히말라야 등반에 대한 보도와 평가가 자의적 민족주의에 젖어 리얼리즘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함께 살펴볼 일이다.

남선우(월간 사람과 산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