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수요일

농산물 유통공사 유럽전시관 (네들랜드 로텔담 소재) 윤장근 관장(고교 3년 선배)을 만나기로 했다.
10시 30분 브뤼셀 미디역. 왕복 40유로. 2시간 소요.........
로텔담 중앙역에 하차. 헤이그 이 준 열사의 묘소와 기념관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것 같다.
윤 관장께 전화를 하고 헤이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헤이그 중앙역에 내려 TOURIST
INFORMATION CENTER를 찾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다. 젊은 직원이 자료를 뒤적였다.
영어로 된 안내문을 내밀었다. 그래 여기가 어딥니까? 어떻게 가면 되는냐고 물었다.
무작정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둘러 역을 빠져 나왔다.
이 거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중년 남자 한 분이 친절히 길을 가르쳐 준다.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층으로 된 집에 이준 기념관 이라고 영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신상옥씨와 .최은희씨가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이나 우리에겐 아직
소개되지 않음.
사촌 조카인 이기항씨가 사재로 만들었다는 기념관... 오전에 이홍구 전 부총리가 다녀갔다고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고 있었다. 이화여대에서 한 때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는 부인이 조용하게
기념관을 만든 경위와 이준. 이상석. 이위종 선생에 대한 독립운동사를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셨다.

1905년....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이를 대륙 침략 전쟁에 이용할 목적으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물론 일본은 일본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고종황제들과 대신들에게 강제로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어느 누구도 서명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을사 5적이 문구를 완화 수정하여 서명을 한다.
주한 일본대사 하야시와 이또 히로부미!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한다.
그후........ 운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1907년 6.15일부터 10월 20일까지 네들랜드 헤이그에서 제 2차 세계만국 평화회의( 의장국:러시아,
부의장국:네들랜드)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 이 곳에 우리의 대표를 보내 일본의 침략과 만행을 알리자는 목소리가 ....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비밀리에 받아 든 이 준 열사...( 2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궁녀가 전달.
궁궐 장례관에 몸을 숨겨 위임장을 받았다는 설)
극비리에 일본의 삼엄한 눈초리를 피해 여비를 마련하고 자료준비를 준비하고 그는 구 소련 블라디보스톡을 향한다. (교통편 2가지설 하나는 부산에서 배로 블라디보스톡,하나는 육로로 블라디보스톡 그러나 당시 그가 그의 심정을 읊은 시에 부산이라는 지명이 나와 전자가 유력)
그 곳에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철수를 하지 않은 대사관 러시아 대사관 이위종 영사
( 20세 약관의 나이, 러시아 부인, 이 준 열사 사촌동생(?), 외교관 집안의 자제분으로 외국어 특히 불어에 능통. 이 준 열사의 통역관)와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하여 그 해 6월 25일 헤이그 HS역에 도착...
이 곳 여관급 호텔(1995년 이기항 씨가 호텔을 매입 내부 인테리어공사 완료하여 기념관으로 오픈)에 묶게 된다.
10일이 지난 회의 일정과 위임장 진위여부 확인 불가 등으로 입구에서부터 입장을 거절당했다.
물론 일본의 방해는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니던가... 당시 일본의 힘과 하는 행사로 보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초청장 명단에는 분명히 COREE가 있다.(기념관에 보존) 그러나 일본은 우리에게 통보도 하지 않았다.물론 그들 입장에선 우리가 외교권이 없기 때문에 통보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6.27일 이들은 우리의 자주권 회복과 일본의 만행을 외치며 입장을 허가해 달라는 글을 만들어
취재 기자단들에게 뿌렸다. 그리고 우리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했다.( 제1차 독립 선언문의 가치가 있는 글, 기념관에 자필이력서와 함께 보존)
7월 5일자 평화회의보 기자 회견(?) 등 수 차례 유인물 돌림...
오스트리아 저널리스트 오지리(PEACE ACTIVIST. 1889년 『무기를 땅에 던져라』로 노벨상 수상. 책 27개국으로 번역. 노벨의 비서 일주일. 오스트리아 유로화 동전 뒷면에 조각)등 영국 기자들이
많은 도움으로 우리의 글을 알림. 그러나 그러나......그는

7월 14일 저녁 7시 민족의 아픔을 지고 돌아 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떠나고 말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추도사는 네들랜드의 YMCA 당시회장(전 법무 장관, 부총리 등 역임) ,
뺨에 종기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밝혀진 사인은 없음. 이위종 선생의 부인이 아파 헤이그에서 자리를 비운 뒤 얼마지 않아 그는 죽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신 학교를 졸업하고 판사를 역임했다.
우리가 배운 할복자살은 미화일 따름이며 선생의 죽음에 대한 설은 3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굶어 죽었다. 체면이 구겨 지는 듯한 얘기지만 ... 여비마련이 힘들었던 데다 음식 맛이 맞지 않은 것은 차치하고 라도 조국의 어려움으로 입맛조차 있었겠는가
둘째 일본에 의한 타살......음식물 독약 투여 등
셋째 지병에 의한 죽음.
물론 입증할만한 자료와 증거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닌 듯 하다.
그건 남은 자들의 몫이자 우리가 끝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7월5일 장례
1996년 국립묘지(?) 안장.....
방명록에 난 이렇게 남긴다...『편히 잠드소서! 님의 희생이 조국을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미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님이 다녔던 길을 따라 헤이그 HS역으로 오던 길은
왜 그리도 발길이 무겁던지 몇 번이고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로텔담으로 향했다....

선배를 만나 맥주부터 시작하여 네들랜드 곡주(우리의 안동소주와 비슷)를 새벽까지 마셨다.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한국에선 수출입 통상 등을 주제로 대학강의도 많이 다녔다고...
하여튼 입담이 대단하다 . 내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리고 모든 논리에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
그리고 쉽다. 한국의 정치와 세계의 경제 그리고 문화, 삶에 대해서 밤새도록 마시며 얘기 했다.
유럽에서 한국식으로 술 먹기는 처음이다.
다음날 대사관 농무관과 점심약속도 취소를 했다.
30일 저녁 하나로 마트분사 유럽연수단들과 저녁을 같이 하고 집으로 ........













『내가 느낀 네들랜드는 어떤 나라인가.......』

네들랜드라는 나라는 그리 특색이 없다. 그러나 남다른 매력을 간직한 나라인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그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연합군을 도운다는 명분으로 네들랜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로텔담이다. 시청을 제외하고는 옛 건물이 하나도 없다.
안네의 일기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유대인들이 이 곳으로 많이 이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찌의 실상을 일기로 적었을 뿐인데 어찌 그토록 유명해질 수 있을까..생각해 볼일이다.
모두 현대식 빌딩에다 최신식 시스템으로 즐비하다. 시청을 중심으로 폭격물을 사정하다보니 시청은
남았다는 얘기다. 물론 시청을 폭격하기 이전에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네들랜드어는 배우기가 무척 어렵다고들 한다.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을 합성하여 만든 언어다.
그러다 보니 네들랜드인은 보통 4-5개 국어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면
혓바닥이 구르고 침이 튀기고 『흐르 . 하르 등 발음』 정말이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고유의 음식 먹거리... 거의 없다. 오히려 식민지였던 나라(인도 등)의 음식(예 라이스터플)이 인기가
있다.
유적... 유적이라고는 풍차. 그들이 땅을 메우고 물을 퍼고 방앗간을 돌리고 하던 풍차.
우리나라의 물레방아를 연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