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년 새해를 맞아

부산대학교 OB산악회 회장님, 여러 회원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는 2001. 10월부터 [한국의 산하] = http://mountains.new21.net/
> "산행정보게시판"을 통하여 "재악산(載嶽山)"에 대해
글을 올려 드리고 있는, 경남 밀양의 도재국입니다

지난해 귀 산악회에서 재악산 산명에 대하여
많은 협조를 해 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귀 산악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랜만에 왔습니다.
지난 해에 재악산에 대해서 많은 글을 올릴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올 해에도 귀 홈페이지 게시판에 제가 많이 방문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인터넷 홈페이지 "한국의 산하" > "산행정보게시판"에
저가 열 네번<14>째 올린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정승동과 재악산에 대해서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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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재악산(載嶽山) 정승동(政丞洞), 정승(政丞)의 실체

[낙동정맥과 영남알프스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재악산(載嶽山) 관련 글의 목표(目標)는 다음과 같습니다]
□ [천황산(사자봉, 해발 1189m)] ⇒ [재악산(載嶽山, 사자봉, 해발 1189m)] 으로
□ [재약산(載藥山, 수미봉, 해발 1108m)] ⇒ [수미봉(해발, 1108m)] 으로 환원(개명) 하자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밀양의 향토사학자 손흥수(孫興銖) 선생님과 고려왕조사(전 7권)를 편수하시고 전화로 고려 정승(政丞) 김용(金鏞)의 일대기에 대한 사료를 전해주신 경기도 화성에 계시는 고려사학(高麗史學)의 원로(元老)이신 류재하(柳在河) 박사님, 병원 입원 중에도 불구하시고 관심을 보여주시고 협조를 해주시는 서울의 학문사(學文社) 김부식 이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태까지 저는 재악산(載嶽山)의 산길을 가면서, 밀양의 향토사에 대한 글을 올려 드렸으나 잠깐 중단하고, 지금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고려왕조의 한 시대에 "반란의 역사", 그 중심에 섰던 김용(金鏞) 정승(政丞)에 대한 공민왕대(恭愍王代)의 고려사(高麗史)의 역사기록(歷史記錄)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길은 "재악산(載嶽山)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길[재악산(載嶽山) 산명(山名)이 맞다는 것을 제시하는 역설적(逆說的)인 증거(證據)]" 이기에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1] 밀양의 3대 불가사의(不可思義)와 하나의 의문(疑問), 정승동 유래

밀양은 명승고적과 역사적 유물이 가장 많이 산재해 있는 지역 중의 한 곳이며,
①재악산(載嶽山) 얼음골
②밀양시 무안면에 소재한 땀흐르는 사명대사의 표충비각
③밀양시 삼랑진읍 만어사(萬漁寺)의 물고기처럼 생긴 수만은 종석(鐘石)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사의한 것들은 결국은 과학적인 차원에서 대략적으로 증명되어졌으나

④재악산(載嶽山) 끝자락에 있는 정승동(政丞洞)의 정승(政丞)의 실체는 규명되지 않고 있었으며, 밀양인과 밀양을 찾는 사람들, 특히 산악인중 정승골을 찾는 산악인(山嶽人), 특히 정승동에 살고 있는 주민들조차도 의문의 숙제(宿題)로 남아 있었습니다.

[2] 베일에 쌓인 정승동(政丞洞)과 그 위치

위와 같이 재악의 산하인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원구천 마을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정승동의 정승(政丞)에 대한 실체는 현재까지 베일에 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승동은 재악산(載嶽山)과 정각산(鼎角山)의 경계를 이루는 재악(載嶽)의 삼간(三幹, 第一幹 : 북부능선, 第二幹 : 서부능선, 第三幹 : 남부능선)중, 서부능선에 위치하며, 재악산(載嶽山)과 정각산(鼎角山)의 경계를 이루는 정승골에 위치하며, 정확하게는 재악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 정승동(政丞洞) 정승(政丞)에 대한 지리역사(地理歷史)의 기록 왜곡(歪曲)

이 산록에는 밀양은 물론이고 외지의 산악인들이 정승골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자주 찾는 곳입니다. 오는 사람마다 정승에 대해 물어옵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도 정승동의 정승에 대한 정확한 유래를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정승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조차 정승의 유래를 듣거나, 찾기 위해서 산악인들이 현지에 와서 물어와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밀양의 향토사료에 기록된 실체가 불분명한 신라의 어느 왕이 나병(癩病)을 고치기 위해서 영정사에 왔을 때, 왕은 표충사(당시 영정사)에서 영정약수를 마시며 치료를 하고 있었다 하며, 왕을 수행한 그 정승은 영정사로부터 삼십리나 떨어진 이 깊고 깊은 먼 정승골에 거처를 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내용을 밀양의 향토사료인 1932년대에 발행된 밀주지(密州誌)의 한 부분에서 옮겨와 적은 기록을 다시 인용하여 대답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4] 정승(政丞)의 성(姓)을 왜곡시키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이 골짜기에 온 정승(政丞)의 성(姓)이 "유"씨이므로 "유정승(政丞)"이라고 항간에 떠돌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1932년대에 발행된 밀주지(密州誌)의 한 내용입니다. 문장의 말미에 "其政丞留"라는 글이 있습니다.

최근에 자신이 정승동 정승의 유래에 대하여 잘 안다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정승의 유래와 성명(姓名)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승의 성(姓)이 "유"씨라고 아래의 한문의 문장에서 대강 들었던 것을 빌려와서 대답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그 정승이 머물렀던 = 其 政丞 留(그 정승 유)] 라는 "한자(漢字)의 문장"을 "한글"로 엉뚱하게 왜곡시켜

다음과 같이 전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승의 성이 유씨이다 ⇒ 其 政丞 留(그 정승 유)"
라고 유식하게 답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최근에 주변에 전해져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식의 어떤 힘있는 사람들의 지리역사의 왜곡을 가장 혐오하며,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의 극치가 아니고, 어떤 힘에 의한 진실의 굴절인 것입니다. 차라리 무식해서 그러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 특히 산악인(山嶽人)들은 산(山)에 대한,
이러한 왜곡을 용납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5] 안학수 저 "밀주지" 제2권 내용 일부

<원 문>
政丞洞
水石深僻可隱者盤旋 諺傳新羅王治病於靈井寺其政丞留

<한 글>
정승동
수석심벽가은자반선 언전신라왕치병어영정사기정승유

<해 설>
정승동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면 계곡은 깊고, 절벽 또한 높고(깊고) 어두워 숨어살기가 적당한 곳이다○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영정사(표충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정승은 정승동에 머물렀다.

[6] 정승을 찾아 10년 가까운 세월을 노력한 손흥수 선생

저와 같이 재악의 산록을 헤메고 있는 손흥수 선생은 정승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10여년 가까이 재악의 산록을 살피며, 정승의 유래가 있는지 여부를 500여개의 마을을 찾아 묻고,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밀양에 산재한 이러한 자연마을에 대한 지명의 유래를 찾기 위해서, 각종 향토사료와 도서들을 살폈습니다. 산록에 산재한 무수한 비문(碑文)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밀양의 어떠한 자료와 증언에도 정승(政丞)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흥수 선생은 위와 같이 재악산(載嶽山)의 증거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정승동의 유래를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안학수 저 "밀주지(密州誌)"를 제외하고는 정승동에 대한 기록을 그 때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7] 고려 정승, 김용(金鏞)을 찾다

앞에서와 같이 십여 년의 세월동안 조사한 결과, 정승의 흔적이 보이는 마을은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원구천과 재말리를 넘어 재악의 산록 끝자락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정승동(政丞洞)"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수년이 흘러 손흥수 선생은 한 서점에서 구입한 오상출판사 발행 "이야기 고려사(高麗史)"라는 도서에서 고려 공민왕 때 김용이라는 정승이 반역죄로 밀성군(密城郡, 그 당시 밀양의 지명)으로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이 것은 손흥수 선생이 10여년 가까이 찾아온 각고의 노력 결과라고 봅니다. 정말로 반가운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대형 서점에 들러 고려사의 도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학문사" 발행, 류재하 저, "高麗王朝史(전 7권)"를 발견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에는 "고려사" 및 "고려사 절요" 등에 근거하여 김용에 대한 내용이 년도별, 월별, 일자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 도서의 명칭 및 출판사를 거론한 것은 재악산(載嶽山)의 증거를 좀더 명확하게 알려 드리기 위해서 기록한 점에 대해서 오해 없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승동(政丞洞)에 관한 글을 앞으로도 7회에 걸쳐 더 연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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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악산 관련 연속 게시물(글) 열람 안내]
이 산(山)에 대한 홍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부가 설명을 드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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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