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어 마시는 술인가?
산악정신은 고통과 고뇌의 작업 중에 산이 주는 계시와 지혜의 그 사랑과 겸손으로 살아가는 산악인의 실재가 아니던가? 왜 그리 술을 좋아하고 마셔대는지?  
산이 주는 순수와 청결의 마음은  어디다 버려두고 술만 마셔대는가? 우리는 육신의 고통 중에 얻는 오래참음과 인내 그리고 극기는 육신의 마취, 즉 정리되지 않은 정신의 마비. 왜 마약같은 알콜중독에 빠져 사는가? 적어도 산악인은 산악정신의 근간을 이루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지독하게도 방종의 오만과 교만으로 생활의 실재에서 오는 괴리에서 오는 자위적 위안인가? 나도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산이 주는 그 순종과 겸손은 이런 것이 아닐거다. 더욱이 요즘 전통적 산악인들의 정신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육신의 오감과 기능성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 무슨 산악 마라톤인지? 알 수 없는 기형적 육신적 지향에 슬픔이 앞선다. 이 말세적 엄청난 사회적 문제도 산악정신에 비춘다면 과연 어떤 유익된 방향의 계시가 있지 않을까? 나는 단연코 산악정신의 기본적 사고와 정신구조에서 이 나라 국민이 건전한 정신적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생각한다. 말초적이고 비이성적 정신은 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전통 산악운동은 산과 인생의 사랑이다. 산악운동은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기본적 순종과 겸손이라 생각한다. 우리 세대별 계층별 정신적 괴리의 분열과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총명을 산에서 얻을 수 있다. 진정 산사랑은 무엇인가?  
알콜중독과 육신적 문란은 산이 주는 총명의 사고가 아니다.
책임없는 변덕은 산사람의 것이 아니다. 산사랑이 주는 총명의 관찰과 지식의 판단과 지혜의 결단을 잊어버리지 말자. 뒷산만 올라가도 누구나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산악정신을 왜 외면하고 허상에 착각하고 속고 사는지? 우리를 다시 한번 전통적 산악운동을 곰곰이 생각 해보자. 15년만에 다시와서 몇개월 살다보니 패배감에서 얘기하는것 아니다.
그리고 형님들이 저 세상으로 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많이들 늙으셨고, 많이들 써 먹은 만큼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본다. 나 또한 척추 다섯 마디의 변형과 무릎들이 좋지 않다. 거의 30년 넘게 항상 연례행사처럼 고통의 두려움 속에 살아왔다. 참 많이 술 속에도 방탕하게 살았다. 그 맨 정신으로 올바르게 곧게 살수 없음에 회포로 아니면 도피하고픈 충동의 자학으로, 정면돌파가 아닌  우회적 탈출에 술에 의지했음도 자인되는 서글픈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산사나이들의 의지가 자신의 교만이 아닐터인데도 불구하고, 방탕의 술에 의지하는 것은 산에 대한 절대적 순응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인생 60에 때늦은 산에서의 묵상이 나를 새롭게 깨우는 그것들은 너무나  후회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 회한이 진정 산사나이의 정신구조와 사고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으로 다가온다. 산사나이는 너무나 강하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이 많은 것은 자기의지의 교만과 순응의 부재일것이다. 산에서의 순응과 겸손과 사랑은 그 인생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도망자는 그렇치 않다.  
산에서 받은 것이 너무나 많은데 정작 나는 무엇으로 살았는가?          
지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교만과 요행으로 산 것 보다 산이 주는 총명과 지식과 지혜로 산것이 너무나 자랑하고픈 것은 행운의 산사나이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산악운동의 산악정신으로 살아가는 산사나이는 정말 이세상의 행운아 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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