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꽃향 짙은 풀섶에 새초롬
억새꽃 피어나고 있다.
무성한 허물들 얼키설키
잎 되고 넝쿨 되어 자라고 있다.
누구인가
스쳐지나가지 못하고 붙들리어
산에 들에 하릴없이 세상사에
생각들을 피우고, 꼬치꼬치
마음 일으키고 있는 자.
산에서 가장 은밀한 부분이기라도 한 듯
첨벙첨벙 계곡 물가 바위들이야
몰래몰래 푸른 이끼들 속에
보드랍고 촉촉한 기억들을 간직하겠지만
저 끝이 없는 하늘
두리둥실 한 조각 구름을 보면
오고감의 흔적일랑 지워야 할 일이다.
속속들이 어린 것들 녹여야 할 일이다.
본 바도 없고, 들은 바도 없고
끝내는 아는 바도 없어서
저렇듯 바람과 구름 활개를 치며 나다닐 수 있어야
하늘이 참 하늘답다 하리라.
천 부처 만 보살 데리고, 그때서야 제대로
화엄벌의 한 줄기 늪길을 걸었노라 하리라.
오랜 안거를 끝내고 귀환하신 형님! 반갑습니다.
무뎌짐과 바래짐도 세월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러기같이
서리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햋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 서정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