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올리려고 보니 제목 정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옛날에 밥 벌어 먹고 살던 공작기계 옵션 중에 ATC (Automatic tool changer)라는 게 있습니다.

흔히들 쉽게 “자동공구교환장치”라고 표시합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 영어 단어 순서대로 번역한 것(automatic: 自動, tool: 工具, changer: 交換裝置)을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동”이 무엇을 수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1. 자동+공구 (“수동 공구”는 없냐고 물어 온 고객도 있었습니다)

2. 자동+교환 (“수동 교환”은 당연히 있습니다)

3. 자동+장치 (“장치”니까 대충 자동일 것이라고 짐작은 합니다)

4. 자동+교환장치 (한참 생각을 하면 알 수는 있습니다)

등이 가능한데

정확히는 4번의 의미입니다.

영어로 하면 tool+changer가 하나의 복합명사이고 automatic이 형용사이니까 복합명사일 경우 형용사는 뒤의 명사를 수식하므로 automatic changer를 수식하는 것으로 됩니다.

우리 말로 하면 명사+명사+명사+명사이고, 또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읽는 순서대로 이해하니까 “자동”이 “공구”를 수식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굳이 제대로 번역한다면 “공구자동교환장치”라고 순서를 바꿔야 합니다.

물론 띄어 쓰기의 문제도 있지만 논외로 합니다. –그 유명한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같은 것.

사실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의 영향을 생각없이 받아들인 것이 문제가 더 큽니다만.

 

월남전을 소재로 한 “하얀 전쟁”이라는 반전(反戰) 소설의 작가 안정효 씨는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어느 저서인지 잊었지만 “번역은 반역이다(Translators, traitors!’).”라는 독일 철학자의 말(검색하면 이탈리아 속담이라고 나옴; traduttore, traditore!)을 인용했었는데 번역작업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가 아니라 문화와 정서와 경험을 옮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기어 주연의 “Legend of Fall”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가을의 전설”로 둔갑했는데 서양 문화-특히 기독교 문화를 모르는 사람의 소행입니다. fall”을 아무 생각 없이 “가을”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Fall Eve의 타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Because Eve tempted Adam to eat of the fatal fruit, some early Fathers of the Church held her and all subsequent women to be the first sinners, and especially responsible for the Fall(… 이브가 아담에게 치명적인 열매를 먹도록 유혹했기 때문에 교회의 일부 초기 교부들은 그녀와 이후의 모든 여성을 최초의 죄인, 특히 타락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또 한가지만 예를 들면 그레고리 펙 주연의  Twelve Oclock High” 라는 영화 제목은 “정오의 출격”으로 되었습니다.

12 방향 위쪽이라는 뜻으로 적기의 방향을 알려 준 말인데 어떻게 이런 번역이 나올 수 있는지……

 Robert”를 “Bob”으로 바꿔 부르고, 결혼하면 남편 성으로 갈아 버리는 서양 문화와 달리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는 이름이나 명칭을 아주 소중히 여겨 최악의 경우 “성을 갈겠다”라는 표현까지도 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제일제당이 “CJ”가 되고 농협이 “NH, 마을금고가 “MG”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충분히 따져 보고 잘 지었으면 제일 좋겠지만, 필요에 의해 또는 부정확하다고 인정되었을 때 바꿀 수도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행위 자체가 맞다/틀리다, 좋다/나쁘다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주제를 바꾸어서, OB (Old Boy)라는 영어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현재 쓰는 의미는 일본식 조어에 가깝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NAVER 사전에 찾아 보면

영어사전 단어·숙어1-5 / 15

old boy 

1. (보통 사립학교의 남자) 졸업생

2. (남자) 노인, 영감

old boy, chap, man, etc.

여보시게[어이, 친구](중류층 이상의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

old boy/girl (old boy)

1. an older man/woman

2. a former pupil of a school

good old boy 

(미국 남부에서) 전형적인 백인 남자

the old boy network

(업무상·사교적 도움을 주고받기 위한 남자들의) 동창회 활동

일본어사전 단어1-2 / 2

ルドボ (old boy)

1. [명사] 올드 보이.

2. [명사] 졸업생 팀. (동의어).

OB (old boy, 오비)

1. 졸업생. 선배.

 

신문기사 표현 하나를 인용하면 “고려대 OB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농구 대잔치니까 고려대 농구부 OB팀이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 대학의 산악부 재학생과 졸업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기사를 쓴다면

다 산악부 출신이니까 생략하고, 재학생은 “부산대 (산악부)팀” 졸업생은 “부산대 (산악부) OB팀”이 될 것입니다.

만일 “OB산악회 팀” 이라고 한다면 모태인 산악부와의 일체감/유대감이 없어져 좀 이질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실제 일어 났던 일인데 정기총회인지 송년모임인지 예약한 장소에 “부산대 OB맥주산악회”라고 안내되어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아마 부산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OB맥주회사에 다니면서 만든 산악회 모임으로 이해 했을 것입니다.

 

산악부/산악회도 전통사회에 없던 문화이니까 당연히 한국말은 없었을 것이고, 일본 사람들이 Alpine Club山岳로 번역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므로 번역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부산대학교OB산악회”라고 띄어쓰기 없이 표기하면

어떤 모임에 관계 없이 “부산대학교를 졸업한 OB들의 산악회”라고 전달됩니다.

“부산대학교_OB산악회”라고 한 칸을 띄어 쓰면

“부산대학교의 특정되지 않은 어떤 모임 OB들의 산악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산대학교_산악부_OB회”라는 표현이 “부산대학교 산악부 OB들의 모임”을 좀 더 정확히 나타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 추진했다가 환원한 실무진들의 마음 고생도 심했을 것이고,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신 선배님들의 소외감 (분위기 상으로는 배신감에 더 가까웠다고 느꼈습니다)도 다 이해가 됩니다만 “뭔가 잘못된 것 같으니 바로 잡는 게 어떻습니까” 하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생각할 필요가 있고 타당성이 인정될 경우 다양한 의견 수렴 및 공식 논의를 거쳐서 채택/폐기할 것을 어렵게 제안합니다.

공식적으로 기각 결론을 내려면 회의록에 누가 어떤 취지로 제안을 했고, 누가 어떤 취지로 반대 의견을 제시했으며, 어떤 절차에 의해 기각 되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잭 웰치가 GM을 개혁하던 시절 했던 이야기를 소개하면

……공장에 뱀이 나타나면 GM에서는 그 뱀이 어떤 종에 속하는지, 어떻게 잡으면 되는지, 그 분야의 전문가는 누구인지, 다른 회사에 선례가 있는지 등을 연구하고, 장문의 보고서/계획서를 쓰고, 격론을 벌이고, 그 뱀을 발견하고 보고하는 과정에 절차적인 문제가 없었는지, 책임 질 사람은 없는지 등을 따진다. 그 동안 뱀은 공장을 돌아 다니며 많은 피해를 낸다. 그런데 제대로 된 공장은 먼저 본 사람이 그 뱀을 잡는다…….

여기서 ""은 비능률/비효율/불공정/불합리 등으로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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