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설악산에서 혼자서 30박 31일 지낸 이야기. 카라비너 두 개만 들고 15m 트레버스한 이야기...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영웅담을 들으면서 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다. '眼前에 신천지가 전개하도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백운산 중앙벽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헬멧 가득히 따다 온 진달래 꽃잎을 대선소주 대병에 꾹꾹 채워 넣은 이름하여 진달래술은 채 익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낼 즈음 형은 조용히 읊조린다.

『우리는 잘 웃지도 속삭이지도 않지만 자일에 맺은 정은 레몬의 향기에 비기리오
깎아지른 수직의 암벽도 무서운 눈보라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지 못한다오
상가에 휘황한 불빛도 아가씨들의 웃음도 좋지만
산사나이는 이 조그만 정으로 살아간다오.』

"형 그 노래 멋지다. 누가 지었어요?" 순간 승렬, 영석, 수정, 태원 그리고 나 우리 모두는 귀를 의심하는 말을 듣는다. "내가 지었다 아이가. 이승훈 글마 군에 가고 나서 혼자 산에 다니면서 생각이 나서 정리했다. 이 노래 좋으면 너거 산악부 부가로 해라. 대신에 작가 미상으로 하고..."
밤은 그렇게 깊어 갔고, 형은 승렬이와 11시30분 가지산으로 야간산행 간다면서 랜턴과 판쵸를 챙겨 나갔고, 우리는 쏟아지는 졸음에 꼬꾸라졌다.

- 1975년 4월 백운산 슬랩아래 24번 도로 옆 개울가에서
(당시 24번 도로는 공사 중으로 비포장인 채 호박소까지만 뚫어져 있었다.)

『금정산 꽃 필적엔 암벽을 기어오르며 설악산 눈 덮일 땐 빙폭을 수놓는다
향긋한 화강암 내음과 부드러운 감촉은 우리의 마음과 다를 바 있으리오
모닥불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산 얘기들
산사나이는 이 조그만 정으로 살아간다오』

금정산~~ 으로 시작하는 2절 가사는 뒷날 내가 지어다 붙였다.

형은 현재 부산경찰청장으로 지난해 12월 부임하여 근무 중이며, 작가미상으로 전국 산악인의 입에
회자되는 노래 '자일의 정'의 원 작곡자이다. 이번에「사람과 산」2007년 4월호에 그 내용이 게재되었기에 그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후배들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일시-1975. 4. 12~16(4박5일)
장소-백운산 중앙벽
대장-이기석/부대장-이영석/신수정,이승렬,김태원 외 이명규
이번 산행은 나에게 의의가 깊은 산행이었다. 아마 명규형이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으리라.
형은 나에게 즐거운 산행을 가르쳐 주었고, 내가 항상 생각만 해 왔던 것 -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 한 나의 사고 - 들을 결론 지어 주었고, 앞으로의 나의 산행에 대한 vision을 던져 주었다.
이런 산행은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없으리라. 정말 뜻 깊은 산행이었다. - 산행일지(제 57차)중에서
- 碩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