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다

서울에서 태어나 40년이 넘게 줄곧 그곳에서만 살았던 내게 산은 오랫동안 아주 멀기만 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던 곳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많은 형제 중에도 산에 취미를 가진 이가 없어 산과 가까워질 기회는 도통 오지 않았다.

산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던 것은 갈래머리 중학생 시절,
대한극장에서 단체로 “산”을 보고 난 후였다.
에베레스트였을까, 눈 덮인 바위 산이 화면 가득 나오던 순간,
나는 그만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산처럼 확고한 스펜서 트레이시의 인간성도 눈물겨웠다.
그리고 그토록 순결한 눈이 한 순간에 엄청난 눈사태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양면을 본 듯한, 작은 깨우침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드디어 진짜 산을 만났다.
같은 반 친구의 가족 산행에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날, 내 생전 처음으로 오른 산은 백운대 쪽
북한산이었다.
그 날 나는 어머니께서 작아진 털 스웨터를 풀어 짜주신 자주색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었다.
평일이면 나비 넥타이를 매고 학교로 출근하시던 친구 아버님은 등산복도
멋있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니커보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은 내 벙어리 장갑을 보시고는 산에서는 다섯 손가락이 있는 장갑을
끼는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를 잡든, 바위를 잡든 벙어리 장갑을 낀 손은 둔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산행 내내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영화에서 본 것과 같은 장엄함은 없었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의미를 새겼던 것도 어제 일같이 또렷하다.
그러나 내 생애의 첫 산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의 말이었다.
“분석아. 넌 산에 있으니 참 어울리는구나.”

주문에라도 걸린 것 같이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다시 증명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여학생 시절의 산행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설렁설렁 들어간 대학에서도 산은 내게 여전히 머나 먼 존재였다.
지금이야 대학 산악부마다 신입회원 모집에 열을 올리지만, 그때만 해도 희망자가 많아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입회원서에 산행 경험이 없다고 쓴 탓이었는지, 나는 회원이 되지 못했다.
산악회 서클 룸을 올려다보며 친구의 말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산을 잊었다.

그 후 산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요가 때문이었다.
직장 동료들을 따라 몇 번 산행을 한 적은 있었지만, 산보다는 하산길에
마시는 막걸리에 더 끌렸었다.
요가에 몰두하면서부터 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한 산자락에 앉아 호흡법을 익히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생전 처음 혼자 나선 대둔산 산행에서 남편을 만났다.

일행이 없는 나는 버스 맨 앞 자리에 앉았다.
옆 자리에는 눈썹이 짙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이는 산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나도 그 당시 한창 빠져 있었던 재즈를 들었다.
산은 조금 밋밋했으나, 바위 밑 낙엽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주 본
산은 당당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이 각자의 음악을
들었다.

그 다음 산행은 설악산이었다.
수렴동 계곡에서 나는 또 다시 생전 처음으로 야영을 했다.
하늘에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 밤, 텐트 밖에서 별바라기를 하는 내 곁으로 들것을 든 사람들이 급하게 지나갔다.
들것 위로 발 하나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산은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험은 내게도 있었다. 능력에 벅찬 무리한 산행으로 산행 전에 다쳤던 무릎이 고장이 난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남편의 등에 업힌 채 눈 덮인 설악동을 내려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남편의 카세트테이프를 처음 보았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남편이 들었던 것은 “얄밉게 떠난 님아” 였다.

5개월 만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고, 그 후 우리는 휴일만 되면 산을 찾아
나섰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산에 다녔다는 남편을 따라 바위에도 오르고
얼음에도 올랐지만,
나는 그저 며칠이고 산을 오르고 내리는 종주 산행이 제일 좋았다.
내게 있어 산행은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찾는 일이었다.
그 즈음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처음 가는 산. 간간히 이어지던 길을 놓치면 때 맞추어 날은 어두워지고, 비 맞은 몸은 춥고,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을 때 잠시 바닥에 앉아 한두 방울 눈물을 떨구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그러면 마음이 투명해지고, 잃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드디어 길이 나타난다.
혹은, 몇 밤을 넘기는 종주 산행. 암만 걸어도 산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 산의 끝은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절망을 느낄 때.
그 많은 순간을 어쨌든 나는 넘었다. 바닥을 모르는 두려움, 돌아보면 그것은 내 친구였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5년 전, 우리는 서울 생활을 접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 터를
잡았다.
남편은 마음 내키면 아무 때라도 산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산에 오른 것은 10번이 채 안 된다. 시골살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팍팍했던 것이다.
시골에 내려와 둘째 해던가, 막내 오라버니의 초대로 여름 휴가를 설악산에서 보내게 되었다.
한계령을 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리운 설악산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어느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산이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은 이제 더 이상 오름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산은 내게 일터이며 삶의 터전이 되었다.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논과 복숭아 밭으로 이어지는 조붓한 산길에서 나는 무수한 스승을 만난다.
왕고들빼기 줄기에 매달려 밤을 새운 듯 온몸이 이슬에 젖어 있던 잠자리,
한없이 평화로운 봄날 고추밭을 갈던 어미소의 눈물,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
갈라진 논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
제 몸무게의 몇 백배나 되는 흙을 뚫고 나온 새싹.

오른다는 생각을 버려서일까, 이제서야 산이 오롯이 보이기 시작한다.
때로 산은 내게 말을 걸기도 한다.
들일을 잠시 멈추고 다랑이 많은 논둑에 앉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산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 때 바람이라도 한 줄기 지나가면,
내가 산의 품에 안겨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옛 어르신들이 어째서 산에 오른다 하지 않고 산에 든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월간 마운틴 2003년 8월호, 내 마음의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