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나를 겸허하게 만드는 스승”

 

“저 산에 놀러가고 싶어서 동아리 가입하려고 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대학산악부 가입은 기타들고 가서 즐겁게 논다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머리 위까지 오는 배낭에 암벽등반과 빙벽등반을 하는 벽 아래서는 군대유격장을 연상시키는 살벌함을 느끼며 산을 배우기 시작했다.

산쟁이들에게는 종교라면 “알피니즘”이 있다. 유럽알프스에서 유래된 말로 자연속에서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알피니즘의 끝에는 흰산이 등장하고 산쟁이들의 가슴에는 항상 흰산 “히말라야”가 있다.

해외원정은 이번이 네 번째다. 반대는 하지만 결국엔 보내주는 집사람이 더욱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어쨌든 이번 원정은 내가 소속된 대학산악부 창립50주년을 기념하여 재학생과 졸업생이 뭉쳐서 네팔 쿰부히말라야의 세계 3대 미봉중의 하나인 “아마다블람”이었다.

높이는 6,900미터급이지만 다른 히말라야의 고봉들과 달리 높은 고도에서 주로 암벽등반을 통해서 등반해야하는 어려운 봉우리에 속한다.

네팔은 등반수입과 관광수입으로 살아가는 나라라서 등반대가 결성되고 등반허가를 받으려면 현지 셀파와 쿡 포터등을 반드시 고용해야하고 몇 년전 네팔 왕족이 가족간의 총격전으로 전멸되고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에는 고용인들에 대한 보험이나 부수비용이 증가되면서 등반비용이 많이 높아졌다.

히말라야등반은 산아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카라반부터 시작된다. 카라반은 2천미터에서 사작해 5천미터까지 천천히 일주일 정도 올라가는데 이 기간동안 몸이 자연스럽게 희박한 공기에 적응하게 하는 것이 등반의 승패를 좌우한다.

특히 카라반 중에 만나는 현지주민들의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래서 “여행은 급류를 타고 가는 인생에서 잠시 강가에 내려 흐르는 급류를 쳐다보는 시간”이라고 했을까

어딘지 모르는 끝을 향해 다른 이가 달리니 나도 앞만 보고 달리는 나를 잠시 돌아보게 해준다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라마제를 지낸다, 자연에 대해 인간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겸손하겠다는 약속의 시간이다.

이 대자연에 들어서면 모두 신선이된 듯 할 것 같지만 그 반대다. 이 고도에서는 대부분이 두통과 메스꺼움과 호흡 곤란이 오고 이런 신체적인 변화를 극복하고 산에 본격적으로 올라야하며 임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평지 보다 훨씬 인간적인 갈등과 심경의 변화를 격는다.

어떤 등반대에서는 대장과 대원 대원간에 대립으로 등반이 무산되고 귀국 후에서 다시 보지 않은 정도로 반목이 깊어지기도 하니 정말 아이러니 하다.

이번에는 9명이 등반을 시작해 캠프1에서 3명 캠프2에서 2명이 심한 고소증상으로 하산하고 4명이 정상에 올랐다. 나는 부대장의 임무를 맡고 이번 원정에 참여했는데 등반대의 어머니다. 대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잘 달래어 하산시키는 것도 나의 임무다. 나는 다행이 컨디션이 좋아 정상에 올라갈 수가 있었다. 마지막 캠프에서는 강풍으로 턴트가 부서지는 사고 낙석에 대원의 얼굴이 찟어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큰 사고 없이 하산을 했다.

대부분 사고는 하산시 일어나는데, 모두 정상만 바라보고 모든 힘을 쓰다보면 내려올 힘이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산에서는 체력이 고갈되면 다리가 움직이지가 않는다. 거기다 경사와 영하 30도를 넘는 추위와 어둠은 인간의 끝을 느끼게 해 준다. 인생의 여정도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잘 내려오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등반대가 등반을 마치고 베이스로 내려오면 등정자와 중도 하산자와의 감정은 극과 극이다.

등반은 등반대의 전체 구성원의 노력에 의해 등반되고 마지막 컨디션에 따라 운좋은 사람만이 오른다. 그래서 모두가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등정자에게만 스포트 라이트를 비춘다. 조력자의 도움없이는 불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우리 등반대는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다른이를 배려하고, 인터뷰도 대원전체가 할 수 있게 하고, 코멘트 역시 구분하지 않고 할 수 있게 했다. 2년간의 준비 그리고 원정은 앞으로 몇 년간 나의 마음의 양식이 되어 우려 먹을 곰국과 같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