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둘레길

 
                           

 이 사람을 얘기할 땐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해마다 매출액을 10배 이상씩 늘리는 기업의 CEO. 비행기 안에서도 자사제품의 홍보전단을 돌리고, 공항 비지니스센터의 컴퓨터 바탕화면을 자사의 홈페이지로 바꿔 놓은 사람. 조지 W 부시 전 미국대통령에게도 한국 산수유의 우수성을 알린 사람. 「10미터만 더 뛰어봐!」라는 책의 저자 등등. 20여 년 전 내가 농민신문사 기자로 일할 때 취재를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산수유 1000 프리미엄』의 광고는 이른바 키치 문화의 상징으로 패러디 됐다 한들 특급 광고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뻡(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요즘 세간에 가장 회자되는 유쾌하고 거침없는 남자, 천호식품 김영식 회장의 한탄어린  CF 광고 카피다.
지리산 산청둘레길 여자남자한테 다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부족하지만 내 마음의 둘레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름 전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 제 5코스 동강-수철구간을 다녀왔다.그 날의 벅참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보다도 더 멋있다고 소문난 제 8코스 운리-사리구간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단성면 운리에 위치한 겨레의 얼을 밝히는 작은 자리, 다물평생교육원 앞 작은 공터에 주차를 했다.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강풍이 느낌온도를 끌어 내린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해 들어 첫눈이 내려 상고대가 피었다고 뉴스는 전했다.
그러나 지리산 산골마을의 평온함을 깨트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가 아침을 깨우고 추수를 마친 빈 들녘은 고요하기만 하다.

 

아침 8시 30분이다. 옷깃을 여민 후 운곡관광농원 표지석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남쪽으로 100미터 쯤을 가다 오른쪽 원정마을로 접어든다. 아침햇살을 온몸에 안은 지리산 단풍은 불처럼 타오르고 길가에 핀 억새들은 기다림의 몸짓으로 연신 춤을 춘다. 탐스러운 김장배추는 어머니의 치마끈으로 허리를 매고 앉아 도란도란 가을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포장된 농로를 따라 농작물을 해치지 말라는 팻말과 함께 여기저기 둘레길 이정표가 눈에 띈다. 먼길을 떠나는 나그네에겐 이보다 더 고마운 것이 또 있을까! 드문드문 짓고 있는 펜션과 뒹구는 낙엽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니 동네의 끝에서 임도가 시작되는 길인가 보다. 키작은 측백나무 가로수가 비탈진 숲길를 안내하고 바람은 살며시 잦아든다.

 

902쉼터에 다다랐다. 9시 30분이다. 아담한 정자에 걸터앉아 충무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따뜻한 커피향에 나를 맡긴다. 동서남북으로 우릴 에워싼 실오라기 능선과 봉우리는 온통 물감으로 채색된 듯 형형색색 울긋불긋...... 정말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 기회에 둘레길을 허락해 주신 마을 주민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땀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길을 재촉했다. 구불구불한 비포장 황토길을 500미터쯤 오르다 비탈길이 끝날 즈음 백운동계곡 쪽을 가리키는 예쁜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와 함께 새로 닦은 듯한 샛길이 눈에 들어온다.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사인페난트가 나무가지에 주렁주렁 걸려 있어 초행길이라 할지라도 찾기는 앉아서 떡먹기다. 


작은 도랑을 건너 샛길을 접어들자마자 짧은 오르내리막길이 나오고 주위엔 오리목나무,소나무 그리고 굴참나무 군락지가 펼쳐진다. 그들은 옷을 반쯤 벗어 던졌을 뿐 지난 여름의 무성함을 짐작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하늘을 덮고 서 있다. 시야가 제법 트이게 수목을 정리하고 석축을 쌓아 길을 넓혀 걷거나 통행하기에도 불편함이 없다.

 

제주올레와 북한산 둘레길 등 여느 둘레길이 그렇듯 지리산 둘레길도 원래 있던 길을 재발견하여 손질을 한 길이다. 둘레길이 만들어 지기 전에 이 길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정상 만을 고집하는 등반객들 에게는 더욱 그랬다. 과거 산골마을 간을 이어 주는 소통의 길에서 교통통신의 발달로 주변야산으로 버려져 있던 이 길은 지금의 컨셉으로 다시 태어나 관광명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숨어 있던 보석을 끄집어 내어 누구나가 좋아하는 형태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다.

 

묘지가 드문드문 있는 것을 보니 터가 명당이거나 인적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울창한 숲길을 걷다보면 단풍으로 불타는 능선이 펼쳐지고  와아∼ 하는 탄성을 절로 내뱉게 한다.어떻게 표현할 방뻡(방법)이 없다. 바람결에 가을잎들은 합창을 하고 솔바람은 내 마음을 정결히 빗질한다.

 

10여분을  가다보면 계곡아래 옹기종기 백운동 마을 민가가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고, 겨울채비를 하고 있는 난들이 낙엽에 묻혀 얼굴을 쏘옥 내밀고 있다. 어쨌든 오래오래 잘살아야 할텐데....걱정이네. 제법 넓던 길이 좁아진다.길이 좁으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우두커니 서있다. 휘파람을  불며 이름모를 곡조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호젓한 산허리는 백운동계곡 상류에 다다른다.

 

시계는 10시 7분을 가리킨다. 얼음처럼 하얗게 얼어붙은 큰바위들과 아름다운 단풍들의 어우러짐에 물빛도 파랗게 물들었구나. 낙엽들은 가을을 못내 아쉬워하며 한잎 한잎  자신을 허공에서 두어 바퀴 돌리다 흐르는 명경수에 띄워 보낸다.계곡에 걸친 나무다리에 앉아 자연을 벗삼노라면 물위엔 낙엽이 세월을 돌고 만산엔 단풍들이 시간을 바래네.

 

물을 건너 왼쪽으로 내려가면 백운동 마을이다. 산삼 녹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곧장 이름모를 재를 오른다.(말등재라하면 어떨까?) 험준한 급류지로 우천시에는 위험하니 되돌아 가라는 안내판을 뒤로 제법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두어 모퉁이 돌았을까 이 험한 산중에 고장난 포크레인(경남02-1400)이 왠 말! 나훈아의 노래 『고장난 벽시계』가 생각난다.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뜬구름 쫓아가다 돌아봤더니 저만큼 흘러간 청춘...

 

하늘이 히끗히끗 보이는 것을 보니 능선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말등재 아래엔 산죽밭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숨을 한숨 돌리고 내리막길을 걷는다. 아기자기 오솔길은 꼬불꼬불 꼬리를 물고 저만치 가고 있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굴참나무는 키재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수채화 같은 단풍에 푹 빠지고 어머니 품같은 아늑한 산길에 젖다보니 어느새 마근담으로 내려가는 구불구불 시멘트 임도가 발길을 막는다.

 

10시 40분이다. 2시간 10분을 걸은 셈이다. 땀은 흘렸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개운한 산행이었다. 길과 길 사이엔 수북한 낙엽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키 작은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름길이라 들어가면 차농사를 망치겠지요. 고마정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포장길은 길고 좀 지겨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선 느림의 미학을 즐기자구나. 터벅터벅 가을 햇살을 벗삼아 미소도 지어보고, 노란 소국을 닮은 웃음도 지어 볼일이다.  가는 가을이 못내 아쉬워 가지 끝을 부여잡고 빨갛게 타는 홍시의 외로움도 느껴보자.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보니 고즈넉이 앉은 문수암에 다다랐다.
대웅전에 삼십삼배 올리고, 돌담에 가지런한 털신을 닮은 기영스님과 차를 나눈다. 눈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두 마리 토종 삽살개는 부처님을 닮아 가는 듯 제법 점잖을 피우며 꼬리를 흔들어 댄다. 스님! 대봉감 가지고 뵐 때까지 평안히 계십시오.

 

엊그제 어느새 제주도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올레 코스에서 처음으로 걷기축제가 열렸다. 산청엔 60㎞에 달하는 5개 구간의 지리산 둘레길이 있다. 이 둘레길이 지리산 둘레길을 대표하는 날이 머지 않다. 산청구간은 어느지역보다도 명소와 다양한 유적지가 많다. 이 곳에서 지리산 둘레길의 축제가 2013년 세계전통의약엑스포와 함께 멋지게 열리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군민이 누구 보다도 우리 산청을 더 아끼고 잘 알아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 산청 군민걷기 대회를 개최하면 어떨까요. 화장실, 주차장,  음식점 그리고 숙박 등  편의시설을 늘려 탐방객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농작물을 보호하고 소음,주차,쓰레기투기, 바가지 요금 등의 문제를 직시하여 지역주민들과의 마찰을 없애는 것이 전제되야 한다야 한다.

 

10여년 전, 해외사무소 근무기회가 있어 유럽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국립공원 등 공원과 성곽길, 순례길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지만 산청둘레길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지리산 둘레길 산청구간은 동강-수철 5코스(11.9㎞),수철-어천 6코스(14.1), 어천-운리 7코스(11.3), 운리-사리 8코스(12.6), 사리-상촌 9코스(11.6) 등 5개 구간이 있다. 코스의 이름을 산청에 걸맞는 멋진 이름으로 네이밍 해보자. 관심을 고취시키는 의미에서 군민들에게  공모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예를 들면 마중길,배웅길,선비길,왕릉길,남명길,문익점길,성철길 등등.

 

둘레길 외에도 답사길을 만들어 보자. 원지에서 엄혜산을 따라 겁외사, 남사 예담촌, 배양 목화시배지를 거쳐 원지로 회귀하는 코스 등.... 

무엇보다도 둘레길 피로감을 호소하는 주민과 마을이 없도록 미리미리 예방하는 것이 최선일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