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일
후배들에게 짐은 안 되어야 할 터인데...
출발 일주일 전 부터 이번 산행 걱정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다행히 고속도로는 텅텅 비어서 6:10 구포 출발해서 12:00 경에는
설악동 주차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오는 도중 정호 덕분에 미시령에서 내려오면서 울산바위의 웅장한 뒷태를
감상 할 수 있었다. 장관이었다.
12:30 매포소 통과,  설악동은 많이도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30년전의 아담하고 정겹던 분위기는 간 곳 없고, 흐릿하게 확대시킨
사진 같이 커지기만 하였지, 도대체가 내 눈에는 여~엉 "아니 올시다" 였다.
신흥사 청동 대불은 그 여~엉 아님의 절정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신다면 혀를 끌끌 차실 것 같았다.
13:20 비선대 도착      와선대 비선대도 장사꾼들의 차지였다. 놀던 선녀도
황급히 도망을 가 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설악의 바위들은 여전 하였다.
아니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예전보다 더 가슴을 떨리게 하였다.
장군봉 암벽 등반 하는 것을 보면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하고, 14:00 마등령으로 출발 하였다.
15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가파른 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땀은 비오듯 했고 숨은 연방 끊어질 듯 가쁘게 몰아 쉬었다. 20분을 채 가지 못하고 계속
쉬어야만 했다. 쉬었다 출발할 때 마다 배낭은 점점 더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갔다.
급기야 물병도 규태에게 맡겨 버렸다. 그래도 걱정한 것에 비해서 참고 견딜만은 하였다.
날씨는 약간 흐린 편이어서 툭 트인 전망은 볼 수가 없었다.
17:00 마등령 정상 도착
준비해온 냉동 포장육을 김치와 두루치기로 요리 해 가며 1.5L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마셨다.
가끔 한 잎 두잎 낙엽이 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마등령에서 해드렌턴을 비춰가며
먹는 소주와 돼지 두루치기 맛은 기가 막혔다. 산에만 오면 김치는 왜 이리 맛이 있을까?
한약방에서 인삼과 녹용 감초를 다 합친 것 만큼이나 산행시 반찬으로서의 김치의 위상은
절대적인 것 같다. 20:30 경 소주가 떨어졌다.
술 먹는 도중 작은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져서 걱정은 되었지만 매트레스에 침낭만으로 취침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갑갑해서 침낭 카바를 내리고 머리를 쏘~옥 내미니 바람도 깊은 잠에 빠졌는지 주위는
너무도 고요 하였고, 기온마져 포근한 편이었다.
게다가 구름까지 걷혔는지, 키 큰 나무가지들의 윤곽선 사이로 총 총 총 별이 보였다.
왜인지 별들이 너무도 반가웠다.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마침 규태가 부시럭거려서 불러 깨웠다. 시각은 자정이었다.
그 때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04:30 경 규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미적거리다 따라 일어났다


10월2일
아침 메뉴는 전복죽이었다. 물을 끓여 포장채로 데우면 되었다. 양송이 스프도 올갱이국도
마찬가지였다. 무게 문제만 해결 할 수 있다면 먹기에는 참으로 편리 하였다.
6:10 여명 속으로 출발    규태와 영도가 배려 해 준 덕분에 배낭은 많이 가벼워졌다.
10kg 남짓 되는것 같았다. 얼마 안 가서 나한봉에 도착했다.
날은 환히 밝아졌고, 멀리 전면으로 서북주능이 보이고, 근처 좌우로는 멋진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풍은 아직 일렀지만 날씨는 그만이어서 하늘은 높고도 높았다.
이 때부터 바위들의 프레이드가 시작 되었다. 바위들은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길은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하였고, 그 때마다 새로운 바위들이 또 다른 맵시로 나타나곤 하였다.
가면 갈수록 감탄의 빈도나 강도는 높아져서 얼마 안 가서는 이야아~ 히야아~ 를 연신 연발 하였다
정호는 쉬는 것도 잊고 연신 카메라를 눌러 대었다.
내내 이어지던 바위들의 행렬은 1275봉과 범봉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중국 황산도 화산도 부럽지가 않았다.
사실 설악이 있어 우리의 산들은 자긍심을 갖게 되고 ,
설악이 있어 우리의 산하는 화룡점정이 되고
설악이 있어 우리는 우리의 산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고
설악이 있어 또 못잊어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나니..
청명한 공간 속에 거대한 바위 군상들이 제 각각 자태를 뽐내는 것이 꼭 제 각각이면서도
또 한 하나같이 쭉쭉빵빵 미인들 뿐인 미스월드 대회장 같았다.
신선봉에 앉아 온 길을 되돌아 보면, 여태껏의 경관을 모두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이 모든 것이
한 눈에 다 들어 왔다. 게다가 멀리 울산바위와 천불동의 바위 군상들도 적당한 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내설악 전체가 한 폭의 거대한 그림처럼 시야를 가득 메워왔다.
또 오고 싶고, 다시 보고 싶고, 또 안기고 싶고, 다시 느끼고 싶고...
설악은 그것도 가을의 공룡능선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던 첫 사랑.
바로 그 사람 같은 산이다.
10:00 희운각 도착해서 배낭은 대피소에 맡겨놓고, 간식과 물병만 들고 10:20 정상으로 출발했다
소청 못 미쳐서 하산하고 있는 젊은 여승 두명을 볼 수 있었다.
11:20 중청대피소, 11:40 대청봉 도착. 김치근 회장님께 전화를 드리고, 기념 촬영 하고
내 외설악 경관을 20여 분간 더 음미 한 후, 하산을 시작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상 바로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젊은 수녀 두명을 발견했다.
오늘은 참 특이한 날이다 여승과 수녀의 등반 모습을 연속으로 보다니..
소청 까지의 길은 완만한 내리막 길인데다 시야는 툭 트여서 고개만 돌리면 설악의 기막힌 풍광이
다 눈에 들어 왔었다.
산을 찾는 성직자들은 우리는 모르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 다 해결해 주는 신을 섬기는 사람이 무엇이 아쉬어 산을 찾는 것인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는 은산 철벽 같은 세상을
봄날 아지랑이 같은 세상으로 바꾸어 살려는 스님들은 또 무슨 까닭으로 산을 찾는 것인지?...
뒤돌아 보면, 내 인생에 열심히 한 것이라곤 서너가지 밖에 없는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년 공부, 대학때의 3년 등산, 집사람과의 6년 연애, 그리고 2년 동안의
생수영업.    그 중에서도 꽃같이 젊었던 날, 내 나이 스물 언저리,
그 때에는 열심히 산을 다니는 것이 젊음을 보람되게 보내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고
'산에서 하는것의 절반만 사회에서 해도 성공은 자기가 보장한다'며, 큰 소리치던 한 해 선배의
말도 순진하게 믿으면서 산을 다녔다.
사실 산을 쫓아 다니던 그 시간에 사시 공부를 하고, 취업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은 훨씬 더
잘 나가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맹세컨데 그 때는 이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달라지고 싶고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서 그런것은 아닌것 같은데
저 능선과 바위를 보고 있노라면 왜 항상 가슴에 회한 같은게 맺히는 것일까?
지나간 그 시간들이 왜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일까?
설악에는 무슨 큰 비밀이 있어서인가?
설악의 능선과 계곡 그리고 바위 곳곳에 젊은 날의 꿈과 낭만이 그리고 끓어 오르던
분노와 격정이, 예쁜 편지지에 옮겨지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묻혀져 있어서인가?
맨살로 묻혔던 그 것들이 낙엽이 되고 돌맹이가 되어 지상도 없이 이렇게 밟히고 발부리에
채여서인가?     그래서 몇 번이고 와 본 곳을 다시 오는 것인데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설레고 하는
것인가?      그래서 저 능선을 보고 저 바위를 보는데 오래전 헤어졌던 부모 형제 만난 듯
그렇게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 것인가?  
이런 상념에 젖어 걷다 보니 소청 근처에서 쉬자던 규태의 말도 잊어 버리고, 한 번의 쉼도 없이
계속 하산 하여서 12:50  희운각에 도착 하였다.
몸 바깥의 열기는 계곡물을 머리에 뒤집어 쓰자 식어졌으나, 속은 그렇지가 않았다.
매점의 캔 맥주는 \3.500이었다. 어떻게 차게 했는지 얼음같이 시원하였다.
제왕도 부럽지 않은 충족감으로 행복감으로 마시는 동안 온 몸이 짜릿짜릿하였다.
한 시간 동안 여유있게 쉬면서 김치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제 저녁 처럼 반 쯤 익은 김치 맛은
공룡 능선의 그 바위들 처럼 환상적이었다.
14;00 비선대를 향해 출발했다. 양폭 산장 근처의 천당폭, 양폭, 오륜폭들과 귀면암, 만물상을
포함한 천불동의 암벽들은, 외설악 수렴동의 그것들과 더불어 가히 남한 최고를 다투는 것 같았다
걸으면서 보는 계곡과 암벽들의 경치에도 입이 벌어졌지만, 휴식시간에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바라 보았던 주위 경관은, 누구 말처럼 그냥 누운 그대로 그 자리에 돌이 되어 버리고 싶은 심경이
들게 하였다. 아름다운 설악이여 자손만대에 영원하라!
16:30 비선대와  신흥사를 지나고 17:00 매표소를 나올 때 쯤에는 , 이제 산행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설악과의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번 산행 도중 언젠가 정호가 물었다 "형님, 다시 설악에 올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때 마지막을 생각했다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듯,
의사들은 삶이 몇개월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슨 큰 설법이라도 하듯 이렇게 읊조린다
"가 보고 싶은곳 있으면 가 보고, 먹고 싶은것 있으면 먹으라"고  참고 내일을 기약하지 말고
이제 내일은 없으니 오늘 하시라고...
내게도 그런날은 올것이다 그때에는 나의 젊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젊었을 때
열심히 했던 것을 후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마웠노라고, 나이 들어 가면서
이렇게 설악을 사랑하게 해 준 내 젊은 날의 고행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주저 없이 '내 마음의 고향 같은곳'이곳 설악에 올 것이다.
그 때에는 내 가슴속 회한 일랑은 모두 계곡물에 띄워 버리고,  '망설임 없이 먼 길을 나서는
낙엽처럼'  설악과 작별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작별은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시 올것이므로.
차가 있는 C지구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 뒷 차창으로 설악동 입구의 바위들과 능선과
나무들이 멀어져갔다. 손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잘 있거라 설악아!
신기 떨어진 무당처럼 네가 꼭 필요한 때가 아니더라도,
살다가  살아가다가  어느 날 불쑥 네 생각이 나면은
내 꼬옥 널 보러 다시 오리니
다시 보는 그 날까지
설악산아 안녕히......



                                    참석자 명단: 신양수, 하정호, 김규태, 민영도